명성황후의 얼굴을 찾아 나서다
작년 8월 다보성갤러리가 광복 72주년을 기념한 특별전에서 명성황후라고 공개한 초상화가 있습니다.
이 초상화에 나타난 두건을 쓰고 하얀 옷을 입은 여인.
갤러리 측은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한 고급스러운 신발과 옷, 족자 뒷면에 '민비 살해범'이라고 적혀있는 명성황후 살해범 미우라의 글씨 작품과 함께 발견된 점 등을 들어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왕비의 초상화로 보기에는 옷과 용모가 너무 초라하고, 명성황후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없다는 반론을 내놓고 있어 초상화의 진위 논란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입니다.
이렇듯 명성황후의 초상화는 아직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사진작가 브레송은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것은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진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찰나의 순간보다 더 깊고, 더 많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사진을 찍나 봅니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간직하고 싶은 순간들… 그리고 못다 한 진실들….
아래는 2010년 홍성문화에 게재된 필자의 ‘황후의 얼굴을 추론하며’라는 기고문입니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추론하며
제1회 홍성옛사진공모전 사진 수집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지난 4월 1986년 6월 서문 당예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생활과 풍속, 상ㆍ하권)'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 사진은 20세기 초기의 것이 중심이며 촬영 연대는 엄밀하게 보면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반의 것이다. 사진원판은 서문 당위 일본 국서 간행회와의 계약에 의해 한국 내에서의 출판권을 양도받아 발행한다고 서문에 적혀있다.
흥미로운 마음으로 상권의 책장을 넘겨보던 중 "고종과 그 아들 순종, 고종, 흥선대원군 이하응, 평복 차림의 고종,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 영친왕의 생모 엄비(양장 차림), 창덕궁 순종비 윤 씨, 떠 고지를 얹은 큰머리 제조상궁의 사진을 차례로 보았는데, 당의를 입고 있는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실려 있는 사진이 그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지만 제15장 상류계급의 사람들이라는 부제 속에 궁정(宮廷)의 사람들에 이번에는 '민비'라는 사진이 또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사실 이때까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일상이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진 속의 명성황후는 나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여름 우연히 동아일보 신문 기사를 보면서 사진 속의 명성황후 존재가 되살아났다. 115년 전 러시아 신문에 실린 명성황후의 세밀화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필자가 알고 있었던 상식은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로 유명했던, 머리에 커다란 어여머리와 큰머리, 활 머리를 올리고 손을 가운데로 모아 앉은 여성이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궁녀의 모습이었다는 정도였다. 기사 속에서 전남대 세계 한상문화연구단(단장 임채환)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된 일간지 노보예브레먀 1895년 10월 21일 자 별지 8쪽에 실린 명성황후 세밀화를 동아일보에 공개했는데, 이 세밀화는 가로 5cm, 세로 8cm 크기로 밑에는 '시해당한 조선의 황녀'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세밀화 속 명성황후는 중국식 복장과 머리 장식을 하고 외모가 다소 서구적이다.
이 세밀화가 명성황후를 만났던 러시아 공사 부인 등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허성태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교수는 "당시 황실 법도 상 외부 화가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없는 만큼 목격자가 전한 인상착의를 기초로 그려진 것 같다"라며 "당시 이 그림을 그린 러시아 화가가 한복을 보지 못해 명성황후가 중국식 복장을 한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명성황후가 다소 서구적 외모로 그려진 것은 당시 러시아 정부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민원 원광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집위원)는 "당시 일본은 명성황후 초상화를 뭔가 어색하게 그렸다"라며 "러시아는 명성황후와 호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오뚝한 코에 이지적인 눈매와 계란형 얼굴 등 자신들과 친숙한 서구인의 이미지를 그린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필자가 보아도 세밀화 속의 명성황후는 러시아 귀족 부인의 모습이지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짜 명성황후의 사진은 어디에 있을까. 황후는 사진으로 된 초상을 남기지 않았던 것일까. 또는 황후가 남긴 사진은 모두 유실되거나 누군가에 의해 말살된 것일까? 그렇게 필자의 명성황후 여행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것들은 많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명성황후의 생전 성격과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사진과 초상화가 있을 리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오죽했으면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만 나타나면 여기저기서 난리일까. 1994년 작가 이수광 씨가 교과서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이 허구라는 지적을 하며 불붙은 명성황후의 어진(御眞, 실제 얼굴) 찾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때문에 필자의 명성황후 사진 찾기 작업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순간 충남 투데이 편집국장으로서 일했던 당시의 희열이 몸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다. 몇 해 전 중고제 판소리의 대가 김창룡의 출생지가 결성면이었다고 최초로 밝힌 것, 그리고 이응로 화백의 생가가 홍북면 중계리라는 기사 등 근대사의 인물과 관련된 기사의 취재 과정이 절대 간단치 않았기에 잠시 잊고 있었던 기자로서의 본능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혹 특종이 아닐까? 하는 망상 말이다.
늦은 밤 두 장의 사진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이미 한 장의 사진은 궁녀의 사진으로 판명이 난 것이므로 다른 한 장의 초상화 사진은 나에게 많은 의문점을 던지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사진으로 보는 조선 시대(생활과 풍속, 상-하권)라는 책에서 볼 수 있듯이 명성황후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나, 남편 고종, 그의 친아들 순종, 그 외에 영친왕, 의친왕 등 조선말-대한 제국 시기 조선 왕실 주요 인물의 사진 자료는 흔한 데 비해 명성황후는 아직 확실한 실제 모습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를 산 다른 왕실 가족들은 사진으로 남아있는데 명성황후는 왜 없단 말인가? 여성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단순화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나 영친왕의 생모 엄비, 순종비인 윤비 등의 사진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럿 떠도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얼굴 콤플렉스 즉, 추녀였기에 명성황후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생전에 아예 사진을 찍은 적이 없거나, 있었다 해도 몇 장 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과연 명성황후는 어떤 외모를 지니고 있었을까?
현재 황후에 대한 사료가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외모에 대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녀를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실린 글이 전부이다.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이었던 신동식 위원은 칼럼 '취재와 함께 놓쳐버린 이야기들'에서 명성황후의 외모를 짐작할 만한 짧은 글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조선조 23대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 외증손녀 윤백영 할머니는 60년대 초 궁중 관련 문화재 고증, 보전 활동에 소리 없이 공헌한 분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총기가 대단하고, 눈이 밝아 문화재 관련 취재 때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윤 씨는 덕 온 공주가 직접 입었던 당의를 보관해 오다가 복식학자 석주선 교수에게 기증했고, 단국대에 석주선 박물관이 개관되며 이곳에 소장케 한 분이다. 이분이 어렸을 때 집안에서 명성황후를 뵌 어른들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뚝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 살집이 흰 분이었는데 단지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 있어 '언짢은 상'으로 어른들이 걱정했다고 한다. 제 명에 못 갈 흠이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이다."
황후를 만난 또 다른 인물로는 영국 고위 성직자의 딸이었던 비숍 여사가 있는데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이래 1897년까지 4차례 조선을 답사했다. 그녀는 조선 방문 기간 중 명성황후를 4차례 만났으며 그녀가 남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을 통해 명성황후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왕비가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전한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릴리의스호턴 언더우드 역시 저서 "상투 튼 사람들 사이에서의 15년"에서 "약간 창백하면서도 꽤 가는 용모에 뛰어나면서도 뚫어보는 듯한 눈을 가졌다"라고 명성황후를 묘사했다.
이렇듯 간간이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황후의 모습을 추론해보면 나이에 비해 무척 젊은 피부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정치가로서의 역량 또한 무척 뛰어난 단아한 외모와 풍부한 학식을 겸비한 여인으로 보인다.
고종은 황후를 매우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국정 일을 의논할 수 있는 동반자로 생각했다. 여성의 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던 시절 수렴청정이 아닌 왕의 동반자로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국내외 정세를 보는 식견과 현명함이 뛰어난 여성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단지 '아름다웠다'라는 표현보다 "명성황후는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뚝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란 식으로 직접적으로 묘사해놓은 글을 보아 명성황후가 추녀가 아니었을 거란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잡지 '삼천리'는 1933년 9월 호에 "민비의 낯을 보았다는 이가 없다"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당시 명성황후는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목숨을 건 정치싸움 때문에 암살을 우려해 노출을 기피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실 명성황후의 사진 찾기 노력은 10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학자 문일평이 1920년대에 쓴 '사외 이문(史外異聞)'에는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 궁중에서 사진 촬영을 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진을 얻기 위해 수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라고 했으니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후 시신과 함께 사진을 전부 불태웠다는 설이 사실이 아니라면 분명코 어딘가에 명성황후의 사진은 존재할 것이라 믿어본다.
예컨대 서문 당예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생활과 풍속, 상ㆍ하권)'라는 책의 사진원판은 일본 국서 간행 회의 것이라 하니 당시 일본이 명성황후의 자료를 본국으로 가져갔다면 어쩌면 사진의 행방을 일본에서 찾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그 때문에 필자가 소개하는 초상화 사진이 일본에서 소장 중인 자료라면 원본 찾기와 그 진위를 다각적으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물음표를 남긴 체 글을 마감한다.
전용식 총괄 기자 jys@hongjui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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